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인사동
길이 0.7㎞, 너비 12m이다. 짧고 좁은 길이므로 가로명을 붙이는 기준에 미달되지만 많이 이용되기 때문에 1984년 11월 7일 도로명이 처음 제정되었으며, 이 길이 통과하는 중심지인 인사동에서 도로명이 유래하였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안국동 사거리에서 장교(長橋)를 건너 청계천으로 갈 수 있었다. 1986년 대학로가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된 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4월 13일부터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거리축제가 열린다. 고미술품·골동품·골동서화뿐 아니라 선인들의 생활도구·장신구 등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갖가지 전통공예품 등이 집결되어 있어 옛 정취가 그윽하다.
한강유람선
1986년 10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취항한 이후 2008년 말 현재 10개의 선착장에서 6척의 유람선(유쉘알파호, 유쉘베타호, 엘페1호, 엘페2호, 씨앤한강랜드호, 우바호)이 운영되고 있다. 유람선의 운영은 (주)씨앤한강랜드가 맡고 있으며, 도심 속의 자연공간으로서 내국인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강과 서울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 나아가 휴식공간을 제공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선착장은 난지(蘭芝)·양화(楊花)·여의도·잠실 등 8개 지역에 있으며, 자연재해나 기상 악화 등으로 인한 결항을 제외하고는 연중 운항한다. 코스는 어느 한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회항 코스와 어느 한 선착장을 출발해 다른 선착장에 내리는 편도 코스로 나뉜다.
봉은사
794년(원성왕 10)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成宗陵)을 위하여 중창하고 봉은사로 개칭하였으며, 1562년(명종 17) 현위치로 옮겼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던 곳이며 서산(西山) ·사명(泗溟)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숙종 때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전각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 재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법왕루(法王樓) ·북극보전(北極寶殿) ·선불당(禪佛堂) ·천왕문(天王門) ·일주문(一柱門) 등의 당우(堂宇)가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 철종 때 승려 영기(永奇)가 조각한 《화엄경(華嚴經)》(81권) 《금강경(金剛經)》 《유마경(維摩經)》 등 불경판(佛經板) 13종, 3,479장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보물 제321호로 지정된 고려청동루은향로(高麗靑銅縷銀香爐)는 동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