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참성단 등 우리나라의 개국과 함께 하는 역사의 고장이며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39년간의 도읍지로서 팔만대장경판각,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 등 민속문화의 황금기를 꽃 피워 온 산실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시 인조임금의 피난수도 이기도 했으며 조선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사건인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등 외세 열강의 침입에 의연히 맞서 싸웠던 국난극복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이어받은 강화는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억 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년 9월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하였습니다.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40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관은 지하1층, 지상2층으로 총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옥외에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해선망 어선, 비석군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광성보
사적 제 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입니다. 조선시대 광해군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입니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초지진.덕진진.덕포진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습니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습니다.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힙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합니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인돌
강화에는 너비 7.1m,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 고인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이다.강화고인돌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고려궁터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입니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