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라 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이면 부여는 금강의 하류에 있는 충남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입니다. 우리 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ㆍ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보고 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수도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부여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공주지역 사람들이 백제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시작하여, 1940년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에서 조선시대 관아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이용하여 박물관 사업을 시작하였고, 해방이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公州分館)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공주사적현창회시기부터 박물관으로 이용된 선화당은 1972년 현대식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은 전시와 각종 문화 행사를 실시하며 지역민의 문화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최근 급격히 증가한 발굴문화재의 보존과, 국민들에게 폭 넓은 문화체험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기 위해 2004. 5월 공주시 웅진동에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분묘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해발 높이 130m의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능선의 중턱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으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습니다.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궁륭상 횡혈식석실분(둥근 천장의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횡혈식의 전축분(굴식 벽돌무덤)입니다.
고란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부소산성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화암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